아니쉬 카푸어의
- 거대한 설치 작품 <동굴> 앞에 선 아니쉬 카푸어
좋은 공간은 깊다. 깊이 있음은 ‘좋다’의 동의어다. 우리는 늘 깊은 공간을 원한다. 세상의 번뇌를 떨칠 수 없기에 미술관에 깊이를 요구한다. 세상과 거리를 둔 공간을 꿈꾼다. 대신 전시장을 나서자마자 세상을 와락 껴안는다. 이 비겁함이 결과적으로 미술관을 생존케 한다. 세상과 겉도는 미술관이 깊고 내밀한 전시를 만들어낸다. 세상이 경외하는 미술관의 시작은 세상과의 구분 짓기에서 비롯된다. 전시를 연다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미술관이 세상의 유행에 민감해지는 순간, 관객 수를 헤아리는 순간 전시는 파국을 맞는다. 다른 공간을 기웃거리던 작가들이 미술관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다. 세상과의 교감을 포기하고 미술관에 어울리는 어법을 찾는 까닭이다. 작가는 침묵이 어울리는 보기 드문 존재다. 모리스 블랑쇼가 옳았다. 어조(語調)는 작가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가 말에 부과하는 침묵의 내밀성이다. 침묵을 자기것으로 만드는 순간, 세상은 그를 훌륭한 작가로 기억한다. 자기를 지워야 미술관에 입성할 수 있다.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곳에서 침묵하는 작가에게 미술관은 목소리를 선사한다. 미술관은 침묵하는 작가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상징이 된다. 미술관이라는 ‘그 부조리의 힘’. 미술관은 예술가의 침묵으로 권력을 얻는다. 아름다움과 숭고에 관한 침묵, 아니쉬 카푸어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은 꺼리는 듯한 삼성미술관 리움은 관객 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아니쉬 카푸어는 인도와 영국의 정체성을 적절하게 섞어 구사한다. 1954년에 태어났으니 예순을 앞둔 나이. 1990년대에 이미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작가, 터너 상 수상 등 지복(至福)을 누렸다. 가루 안료, 비어 있는(void) 조각, 건축 끌어들이기, 회화와 조각의 공존 방식으로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부재, 안과 밖, 비움과 채움, 몸과 정신, 동양과 서양 등 이분법적 경계를 오가는 작가로 미술사에 등재를 남겨둔 상태다. 구상과 추상, 남성성과 여성성,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공존을 좋은 작품의 미덕으로 여기는 당대 미학의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작가이기에 충분히 자격이 있다. 달리 말하면, 절반을 이야기함으로써 나머지 절반을 획득하는 영리한 작가인 셈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숭고하다!
- 1. <나의 붉은 모국, 2003> 2. <현기증, 2012> 3. <나의 몸 너의 몸, 1999> 4. <붉은색의 은밀한 부분을 반영하기, 1981> 5. <노랑, 1999>
그리고, 카푸어의 작품은 깊다. 고고한 리움의 벽면에 뚫린 그의 구멍(void)은 부분이 전체를 능가하는 현실을 역설한다. 카푸어의 작품은 어지럽다. 거울 같은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에 비치는 세상은 뒤집히거나 분열된 모습으로 현기증(vertigo)을 일으킨다. 카푸어의 거울, 아니 스틸 표면은 대상과 풍경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그 속의 ‘상처’를 끄집어낸다. 그의 작품 앞에 선다는 건 정신보다 물질을 우선시하는 후기자본주의에 상처 입은 ‘나’라는 개별적 주체의 트라우마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다. 마음에 바람이 부는 구멍 난 존재로서의 나를 드러내는 카푸어의 구멍 혹은 거울 같은 스틸 앞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이 주목하는 작가는 항상 주체 내부에 존재하는 미지의 심연을 자극한다. 아문 줄 알았던 상처를 건드려 일부러 곪게 만들고 피멍을 남긴다. 참혹했던 자리는 아물기 마련이고 결국 새살이 돋는다는 세상의 법칙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카푸어의 작업이 흔해빠진 거대 설치 작업들과 구별되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내 안의 상처와 대면시키기 때문이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 구멍 난 상처를 응시하고, 후벼 파고, 짓이길 때 상처는 겁을 먹고 슬금슬금 도망친다. 해서 카푸어의 거울은 나르시시즘으로서의 과잉이 아닌 상처받은 자로서의 결핍을 담는 올록볼록한 구멍이다. 왜곡되고 분열된 내 모습을 체험케 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마음속 통로이다. 세상을 향한 존재감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할 때 생겨난다. 때론 우리는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있다.
카푸어의 현기증 나는 구멍이 더 깊이 들어갈지, 아니면 반대로 구멍을 메우며 되돌아 나올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현대미술의 다음 단계를 예감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전설이 된다는 것은 특별함을 넘어 보편적인 무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착시와 환영으로 이루어진 카푸어의 특별한 구멍과 거울 같은 오브제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보편적인 미술의 경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이 절정의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격동의 체험을 지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작가도 있다. 미술사는 이렇게 반복되어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렀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혹은 비상하기 위해 미술가는 자신을 돌아보고 학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고독의 단계를 넘어 ‘몰입’에 이른 작가들만이 역사가 된다. 욕망의 물질과 외형으로 욕망의 거품을 제거하는 정신을 담는 숭고의 메커니즘. 적어도 지금까지 아니쉬 카푸어의 생성물은 고독하지 않다. 그는 숭고함을 향한 몰입의 공식을 아는 작가다. 물론 최종적 승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