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

먹을것/기사 | 2012. 10. 21. 02:48
Posted by 그리고 가을
바다 건너에서 온 손님을 모시고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 불고기를 주문하니 딸려 나온 상추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님과 마주보고 앉아서는 주거니 받거니, 상추 잎에 맺힌 물기를 바닥에 대고 열심히 털어가며 먹어야만 했다. 유명세는 차치하고서라도 가격(고기 150g 1인분에 28,000원, 냉면 한 그릇에 11,000원)만으로 그 음식점은 ‘파인 다이닝’의 기회를 손님에게 제공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고기의 맛을 희석시킬 상추의 물기는 당연히 미리 털어 내야만 했다. 이다지도 사소한 사항을 이 정도로 고급인 음식점에서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우리 음식이라서 그런지 한식을 통해  문자 그대로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미식을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격으로 따져본다면 충분히 파인 다이닝의 범주에 들어갈 음식점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는 뿌리 깊은 ‘비용=음식’, 혹은 보다 더 극단적으로 ‘비용=재료’라는 인식이다. ‘커피 한 잔 단가 00원’과 같이 철저하게 무지에 기초한 기사가 심심할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인식이 모든 소비 만족도 평가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가성비”와 맞물리면 음식은 '위장을 채우는 수단'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다. 다 필요 없고 비싼 재료로 배를 불리면 그만이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마블링의 ‘투뿔등심’이 외식거리의 왕좌를 굳건히 고수하는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서비스의 부재다. 프렌치 런드리를 거쳐 ‘베뉴’를 연 한국계 셰프 코리 리도 최근 필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식의 서비스에 대해 지적했다. 서비스의 부재는 물론 첫 번째 이유와 인과 관계에 있다. 입에 넣는 것에만 비용이 몰리다 보니 인테리어를 비롯한 분위기며, 서비스 등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노력이라 봐야 유니폼을 갖춰 입는 정도에서 그칠 뿐, 서비스 교육의 흔적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음식점에서의 경험은 채운 접시에서 시작해 빈 접시에서 끝나고, 그 앞뒤의 영역으로 확장하지 못한다. 

굳이 한식의 문제를 이렇게 상세히 짚는 이유는, 이러한 원인이 파인 다이닝 양식에도 그대로 이식되어 미식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켈러 등 미식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는 셰프를 인터뷰하다보면 ‘손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좋은 셰프의 제 1조건으로 꼽는다. 이는 요리가 업인 사람들이니 당연히 음식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음식과 다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총체적인 경험으로써 얻는 행복이 곧 미식이라는 의미다. 양식은 우리 문화가 아니니만큼 비롯한 문화의 맥락에 맞춰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지독한 핑계인 ‘우리 입맛에 맞춘다’는 말처럼, 너무나도 충실하게 우리 외식 경험의 잣대로만 받아들여 또 그대로 적용하다보니 가장 기본적인 요소조차 갖추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행복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얼마 전, 이름부터 철저하게 프렌치를 표방하는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로 점심을 먹었다. 거의 마지막에서 손바닥만한 가자미가 나왔는데, 서버가 직접 뼈를 발라먹으라며 나이프를 건네주었다. 등뼈는 그렇다 쳐도 자잘한 가시는 생선살을 씹는 와중에 하나하나 뱉어내야만 했다. 양식, 그것도 프렌치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살만 깨끗하게 발라내거나, 그도 아니라면 서버가 손님 테이블 옆에서 살만 발라 접시에 놓아줘야만 한다. 

서비스에서는 한마디로 프로정신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시고요.’”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해준다. 거기에 서버의 귀걸이며 진한 향수 또는 스킨 냄새가 한 몫 단단히 거든다. 간 쓸개 다 빼놓고 굽실거리거나, 유명인사 보좌하는 보안요원처럼 까만 정장에 귀에는 ‘레시바’를 꽂는 방식으로는 서비스의 프로가 될 수 없다. 어느 미슐랭 별 세 개의 레스토랑에서는 발레까지 가르쳐 심어준다는, 교육을 통한 몸가짐(demeanor)이 서비스의 알파며 오메가다.  

레스토랑의 문제를 먼저 언급했지만 손님에게 책임이 덜하다는 제스처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손님에게 더 책임이 크다. ‘미식=총체적인 경험’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예약 전화를 걸고 기대를 품는 것을 시작으로, 집에 돌아와 음식과 서비스의 여운까지 복기하며 즐기는, 경험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그래서 늘 겪는 한식의 잣대를 양식에 그대로 들이대고는 불만을 토로한다. 트위터에서도 화제가 된 ‘비빔국수 대 파스타’의,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대결구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제는 그렇게 국한할 수도 없지만, 파인 다이닝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파스타가 비빔국수보다 더 비싼 원인은 문화사대주의가 아니다. 손님이 오기 전 물까지 뿌려 가며 깔아놓은 식탁보며 식기, 인테리어, 서비스까지,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 헤아리기 어려운 부문의 비용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객을 전도시켜가며 음식보다 분위기에 치중하는 레스토랑도 많아 문제지만, 어쨌든 원칙이 그렇다는 의미다. 

예약 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것 또한 손님의 책임이다. 외국처럼 대행 사이트를 통해 신용카드를 걸어 놓는 등, 책임감 있는 이행을 독려하는 장치가 없다 보니 예약을 너무 우습게 안다. 약속이되 안 지켜도 책임을 묻지 않으니, 예약은 열심히 하되 취소할 상황에는 그만큼 열심히 알려주지 않는다. 한술 더 떠 크리스마스와 같은 ‘대목’이면 내키는 대로 여러 군데에 전화를 돌려놓고는, 성탄의 기적으로도 분신술을 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드레스코드? 주말 저녁 레스토랑에 반바지를 입고 찾아오는 남자 손님을 보았다는 이야기 정도면 충분하겠다. 

결국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벌어진다. 음식이 문화재는 아니건만, 기회 닿을 때마다 ‘아는 만큼 먹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문화‘재’까지는 못되더라도, 의식주 삼위일체의 한 요소로서 음식이 문화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인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몸을 가리기 위해, 비를 긋기 위해 옷이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벌써 오래 전에 지났건만, 아직도 음식만큼은 ‘질보다 양’의 굴레에 매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술 더 떠 미식의 추구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현실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식의 이해를 넓혀보기 위한 지면을 준비했다. 총체적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복을 이루는 과정이 미식이라면,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를 큰 줄기에서 다소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두루 짚어보자는 취지다. 예를 들자면 프렌치와 이탈리안은 어떻게 그리고 왜 구분하는지,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다면 ‘비스트로’는 뭐고 ‘트라토리아’는 또 어떻게 분류하는지, 레스토랑에서 코스는 왜 시켜야 하며 그 끝에서 방점을 찍는 디저트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고 먹으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살펴보려 한다. 이왕 귀한 지면을 빌려 살펴보는 것, 격식 좀 갖추자는 의미에서 테이블 매너며 드레스 코드 등등 또한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그 명분이 거창하고 고상하게 ‘넓힌 소양을 바탕으로 한 삶의 질 추구’든 아니면 지극히 속물스럽게 ‘아까운 돈 잘 쓰기’든 전혀 상관없다. 행복할 수만 있다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먹는데도 굳이 배워야 하느냐’고 묻는다. ‘손님은 왕’이니 돈이 왕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갖춰준다고 생각한다.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권력만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소양도 갖춰야 한다. 역사만 잠깐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다. 폭군의 말로는 예외 없이 비참했다. 남자들이 ‘가성비’와 ‘입맛은 주관’이라는, 양대 무지의 소산으로 중무장한 폭군의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열심히 먹고 또 써 볼까 한다. 

월간 <젠틀맨>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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