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평범’이라는 개념부터. ‘평범’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과 집단과 자신을 견주는 개념이고 실상은 나는 나만의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갈 뿐이야. 한 사람의 인생은 오로지 주관적인 평가가 통용될 뿐. 나는 상담메일에서 “저는 평범한 2X살 아무개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는데 스스로를 ‘평범한 아무개’라고 소개하면 겸손해지거나 다수에의 소속감이 드는 걸까? 되려 난 자신의 삶의 방식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이 ‘정상’이자 ‘주류’라고 전제를 깔기 위해 ‘평범’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같아. 혹은 나 자신과 나의 삶이 가진 ‘디테일’을 설명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처사일 수도. 특히 나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비범해 보이는’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며 더 심하게는 매사 건건이 비교를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지옥이지.
그리고 ‘비교’. 사실 젊을 때는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어떻든 간에 주변 또래들과 비교 안 할 수가 없지. 문제는 기왕 비교하려면 의미있는 비교를 할 것. 집안환경 같은 불가항을 비교하면 그건 시작부터 자학하기로, 무기력해지기로 작정한 거야. 대신 그간의 개인의 성취를 비교하는 건 꽤 적절해. 이걸로 비교하고 자극 받고 열등감이 밑받침이 되어 의지와 행동으로 연결되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비교해봤자 의미가 없는 걸로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기 위한 합리화’에 불가해. 해 봤자 이겨낼 재간이 없어,같은.
자존감은 하루 아침에 외부의 어떤 변화나 지침으로 인해 생기는 게 아니지. 타인의 시샘과 주변의 기득권적 상황에서 오는 게 아니고, 단지 자발적으로,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성취해나갈 때 생기는 것 같아. 자존감은 그렇게 일상의 자발적인 성실함에서 와야지, 그 자존감이 지속가능하고 건강하지. 순수한 진짜배기 자존감은 내 의지와 노력으로,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성취해 나갈 때마다 조금씩 쌓이는 것일 뿐 공짜는 없어.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나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적어도 노력하는 것, 그 과정 자체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의미가 있지. 그래서 젊었을 때 정신 없이 뭔가를 이 악물고 해보는 경험 – 그게 공부던 뭐든 – 을 하면 어떤 뚜렷하고 구체적인 보상이 생긴다기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기와 기초체력이 다져지는 것 같아. 그러니 주변을 둘러보지 말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존감이 충만해 보이는 사람도 늘 자신을 사랑할 는 건 아니야. 어떨 땐 스스로가 멋져 보이다가도 이내 자괴감에 빠지지. 그 상태가 교차하는 것이 살아있는 인간! 하지만 여기서의 크나큰 차이는 그 기분에 빠져있지만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의 문제. 나를 사랑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의 차이지.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며 자신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라는 좋은 말도 다 필요 없어. 좀 사랑할 만 해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나에겐 이게 있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없을 땐데, 그럴 때는 보편적인 위로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대신 주변의 잡음을 차단하고 나의 근본이나 뿌리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쌓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
글/임경선(칼럼니스트)